Category
  
 정산(2009-02-17 01:46:06, Hit : 2151
 음예공간예찬

음예공간예찬

음예공간예찬

 

타니자끼 준이찌로(谷崎潤一郞)의 수필 하나가 70년이 지난 지금도 잔잔한 울림을 준다.

탐미주의 작가는 사라져가는 일본의 모습과 문화를 사랑했다. 근대화, 서양화를 향하면서 우리의 것들을 버렸던 모습과 70년 전의 일본은 흡사하다.

 

음예(陰翳)란 우리가 쓰지 않는 단어다. 번역자인 김지견 박사는 "그늘도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모습"으로 썼는데 1977년 영어판의 제목은 "Shadow" 라고 번역되어 있다.

E.라이샤우어는 영문판에서

"더 부드럽고 조용하며 더 음울한 미적 전통을 예찬하며 밝지만 난한 서양기술의 산물에 의하여 도전받는 것에 대한 고통"이라고 썼다.

 

다실도 좋긴 하지만 변소는 참으로 정신이 편안해지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것들은 반드시 안채에서 떨어져 신록의 냄새나 이끼냄새가 나는 듯한 정원수 수풀 뒤에 마련되어 있고 복도를 통해 가는 길인데, 그 어둑 어둑한 광선속에 웅크리고 앉아 희미하게 빛나는 장지의 반사를 받으면서 명상에 잠기고 또는 창밖 정원의 경치를 바라보는 기분은 무어라 말할 수 없다.

 

건축중에서 가장 운치있게 만들어져 있는 것은 변소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시화(詩化)한 우리들의 선조는 주택중에서 가장 불결한 장소를 오히려 아취있는 장소로 바꾸고 화조풍월(花鳥風月)로 연결지어 그리움의 연상으로 포장하였다. 이것을 서양인들은 불결하다고 생각하여 대중앞에서 말하기조차 꺼려하는데 이것에 비하면 우리들이 훨씬 현명하고 진정한 풍취의 미를 얻고 있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밝게 하는 것은 보이는 부분이 청결할 뿐 보이지 않는 부분의 연상을 도발시키게 된다. 역시 그런 장소는 어스름한 어둠의 광선에 둘러싸여 어디가 청정하고 어디가 부정한지 구별을 분명하게 하지 않고 애매하게 해 두는 편이 좋다.

 

우리가 이미 잃어가고 있는 음예의 세계를 애오라지 문학의 영역에서도 되불러보고 싶다. 문학이라는 전당의 처마를 깊게 하고 그 벽을 어둡게 하고 지나치게 밝아보이는 것은 어둠속으로 밀어넣고 쓸데없는 장식을 떼내고 싶다. 어느 집이나 모두 그런 것이 아닌 집 한채 정도 만이라도 그런 집이 있으면 좋을 것이다. 자, 어떤 상태가 되는지 시험적으로 전등을 꺼 보는 것이다.

 

풍류는 추운 것인 동시에 누추한 것이라는 경구도 성립한다.

 

일본 칠기의 아름다움은 희미한 빛속에서 발한다.

 

우리가 좋아하는 색이 어둠이 퇴적한 것이라면, 그들이 좋아하는 색은 태양광선이 겹친 색깔이다.

 

현대의 문화설비가 오로지 젊은이들에게 아양떨고 점점 노인에게 불친절한 시대를 만들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처럼 생각된다.

 

 

책에서 몇 개를 옮겼 적었다. 일본의 문화에 대한 자긍심, 국수적인 애정이 깊다.

일본의 지붕을 우산에, 서양의 지붕을 모자에 비유했다. 우산의 기능과 모자의 모양. 소설가의 인식은 흥미롭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주목하며 이 책의 많은 부분을 공감한다.

모호함, 전이, 품격, 침잠, 규정되지 않는 것, 관념적인 상징들을 생각케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들어온 선풍기, 스토브, 유리창, 변소가 아닌 화장실, 축음기, 라디오, 만년필등 문명의 이기.

그것들이 서양에서 오지 않고 동양에서 독자적으로 발명되고 발전 되어 왔다면 축음기는 동양의 소리와 정서를 잘 표현할 수 있었을테고, 사진술이 동양에서 발명되었다면 사진 약품이나 필름으로 동양인의 피부와 용모를 제대로 표현되었을 것이라 한다.

서양종이를 단순한 실용품으로, 동양의 한지를 따스하고 온화한 것, 접어도 소리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필기도구의 차이만을 설명하려는 게 아닌 우주관의 관점으로 이해된다.

규격화된 알파벳과 멋스러운 한자. 그가 살아 있다면 컴퓨터로 글을 쓰는 이 가벼운 시대를 어떻게 묘사할까.

 

아파트는 그늘도 아닌,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공간을 배제한다. 천장의 삼파장 램프는 밝고, 화장실은 유광의 타일과 스텐레스 금구가 번쩍인다. 음예가 깃든 공간은 없다.

나는 가끔씩 새벽의 시간대에 침대에 누워 사색의 유영을 즐긴다. 미명의 시간은 야심한 밤과 달리 감상적이지 않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음예공간이 사유하게 도와주는 조건을 알겠다. 그의 제안대로 가끔 전등을 꺼 보리라 생각한다.

 

이 짧은 글이 시대와 공간을 뛰어 넘어 콜롬비아와 예일대 건축과의 필독서가 된 것은 사람이 생각하여야 할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기 때문이라고 건축가 조성룡은 말한다.

우리 삶의 근원을 두고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의 고유함이 오랜 세월동안 지속성을 가질 수 있었는지?  왜 거기에 그렇게 있었는지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걸 인식하게 한다.

 

영국 더 타임스지 서울특파원인 앤드류 새만기자의 2월7일자 조선일보 기고는 예리해서 기분 나쁘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우리의 객관적 모습... 음예공간예찬과 더불어 이 시대를 사는 마음은 대책없이 무겁다.

 

2009.2.17 정산

 

.....전략

옛날 한국의 수묵화를 한번 보자. 산봉우리들은 하늘을 향해 솟아 있고 작은 외딴집 한 채가 숲 속에 고즈넉이 서 있다. 용이 구름 사이를 헤엄치고, 까치는 나뭇가지에 앉아 있으며 호랑이가 대나무 숲 사이를 내달린다. 전면에는 강이 곡선을 그리며 산비탈을 끼고 흐른다. 그리고 작가의 서명은 우아한 서체로 물결 틈에 들어가 있다.

이 광경은 오늘날 어떻게 그려질까? 산봉우리와 외딴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존재하지만 지금은 건물들의 숲에 혼란스럽게 둘러싸여 있다. 비행기가 머리 위를 날고 비둘기는 비비 꼬인 전선 위에 앉아 있으며 도둑고양이가 골목 사이를 달린다. 강은 이제 폐수의 도랑에 지나지 않으며 산비탈은 아파트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다. 사진에 작가의 서명은 없다. 다만 여러 색깔, 여러 글꼴의 한글 광고판이 여기저기 뒤범벅돼 있을 뿐이다.

참 추하다. 도심 중심부만이 이렇게 추한 것이 아니다. 한국의 들쭉날쭉한 산봉우리들과 드넓은 골짜기, 조각보 같은 논밭은 한때 아시아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풍경 중 하나였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휴식을 찾기 위해 도심을 벗어난다 해도, 당신이 사는 박스 모양 아파트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판에 박인 콘도들만이 당신을 맞이할 뿐이다. 거기서 내려다보는 풍광은 논밭들 사이 번쩍거리는 형광빛 파란색, 주황색 지붕들이다.

꼭 이래야 할 이유는 없다. 프랑스의 프로방스, 이태리의 토스카나, 영국의 글로스터셔 등지에서는 그 지역의 재료로 지은 예쁜 마을들이 자연풍경과 함께 어긋남 없는 조화를 이룬다. 이들 지역 전통 건축양식의 단아한 곡선과 절제된 색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한국인의 '디자인 DNA'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더욱이 한국인들은 세계 곳곳에 굉장히 멋진 건물들을 지으면서 유독 모국에서만 혐오스러운 대량생산품을 양산한다.

한때 값싸고 질 낮은 제품으로만 이름을 알려야 했던 한국의 제조업자들은 지난 10년간 품질을 엄청나게 향상시켰다. 건축에서는 그러한 발전이 보이질 않는다. 왜 한국의 건축가들은 가치를 높이지 않는 것일까? 색채·모양·크기 등 디자인적 측면에서 한국 건축가들의 국내 작품은 끔찍할 정도다. 부동산 투기가 하나의 요인이겠지만, 더 매력적인 건물이 더 잘 팔리지 않을까? 그리고 왜 지역 정부는 구획되지 않고 혼란스러운 재개발을 허가해 이런 미적(美的)인 참사가 지속되도록 놓아둘까.

'어글리 코리아' 얘긴 이제 지겹다. 요즘엔 다른 종류의 '어글리 코리안'이 나타났다. 최근 용산에서도 봤다. 김남훈 경사를 죽음으로 내몬 폭력시위대, 또 재개발 철거업자들이 고용한 폭력 용역들이다. 한국의 재개발사업은 사실 도덕적으로도, 그리고 미적으로도 매력 없다. 재개발사업은 한국의 근대적 발전과 발을 맞추지 못하고 여전히 1980년대의 어딘가에 표류하고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다. 한국인들은 고급 식품·의류·생필품 등에 엄청 비싼 가격을 지불한다. 그런데 그 볼썽사나운 집들에마저 터무니없는 가격을 치르며 구입 경쟁을 하는 데 거리낌 없다니 알 수 없다. 




명사십리 아이의 기숙사 짐을 싸다가 아이가 사둔 책제목들을 살펴봤죠.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아이에게 읽으라는 책들입니다. 예전같으면 대학생이 된 아이들이, 그것도 어디 어두운 곳에 쿡 박혀서 책읽기를 좋아하는 몇 아이들이나 읽을 법한 책들이더군요. 역사 문학 신화 문화비평...제가 만나던 책들에 비해 역자가 다르고 해석이 다릅니다. 뒤적거리다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

<음예공간예찬>.참 매력적입니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편안함을 또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겠네요.^ 회복기에 힘이 될 듯합니다. 고맙습니다.
[2009-02-23]
비오필리에 책을 통한 앎, 사색 그리고 이를 통한 글쓰기 제가 아는 최상의 삶의 모습입니다.
항상 건축가로서 철저하게 반성하고 사유하는 모습을 형님의 글에서 느낍니다.
임상의로서 너무나 부족한 모습을 많이 반성하게 됩니다. 기계론적인 접근에 대한 제스스로의 한계성을 이겨내기 위해 애를 씁니다만 그저 말뿐이구나 생각합니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형님이 늘 견지하시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글 덕분에 오늘 분주한 하루를 담담하게 시작합니다.
[2009-02-25]
정산 커다란 기와 지붕은 가분수인데 서양의 프로포션의 수치와 달라도 안정적이고 아름답지요. 그 지붕아래 처마는 온도가 일정해서 메주의 곰팡이가 서식하기 좋은 조건이구요.
기와집의 사진은 대개 지붕은 노출 오버에 처마는 노출부족이 되지요.
책을 보고서야 처마 밑의 짙은 어두움의 존재를 보았습니다.

축음기나 라디오도 만약 우리들이 발명했다면 우리의 소리나 음악의 특징을 훨씬 더 잘 살릴 수 있는 것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원래 우리의 음악은 조심스러우며 소극적인 것이고 기분 본위이기 때문애 레코드로 하거나 확성기로 크게하면 대부분 매력이 없어진다. 화술 또한 우리들은 소리가 작고 말수가 적고 무엇보다도 '간격'이 중요한 것인데 기계에 걸면 '간격'이 완전히 죽어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기계에 영합하도록 도리어 우리의 예술 자체를 왜곡해 간다. 서양인이 원래 그들 사이에서 발달시킨 기계이기 때문에 그들의 예술에 맞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은 실로 여러가지의 손해를 입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P39
[2009-02-25]  
정산 눈에 안보이는 세계를 없는 세계로 보느냐? 별도의 세계로 보느냐?
책은 종이위에 펼쳐진 세계를 별도의 세계로 보게 하더군요

종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인의 발명이라고 알고 있는데, 서양종이를 대하면 단순한 실용품이라는 것 외에 아무런 느낌이 일어나지 않지만 당지나 일본지의 결을 보면 그것에서 일종의 따스함을 느끼고 마음이 안정된다. 같은 흰 종이라도 서양지의 흰색과 호오쇼카미奉書紙나 카라카미白唐紙의 흰색과는 다르다. 서양지의 표면은 광선을 되튕기는 듯한 맛이 있는데 봉서나 당지의 표면은 포근한 첫눈의 표면과 같이 광선을 안으로 흡수한다. 그리고 손의 감촉이 보들보들하고 접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것은 나뭇잎을 만지고 있는 것과 같이 차분하고 촉촉하다. -P40
[2009-02-25]  


53  [문학,교양] 여행의 숲을 여행하다 [6]  정산 2010/12/10 3768
52  [문학,교양] 자기 앞의 생  정산 2010/10/07 2331
51  [문학,교양] 소방관이 된 철학교수 [4]  정산 2010/07/01 2365
50  [건축,도시] 건축, 권력과 욕망을 말하다 [2]  정산 2010/04/19 2578
49  [예술,사진] 예술가로 산다는 것  정산 2010/01/22 2552
48  [문학,교양] 불꽃, 제삼 인간형  정산 2009/11/05 2381
47  [문학,교양] 면앙정에 올라서서 [4]  정산 2009/08/10 2123
46  [문학,교양] 아파트에 미치다 [3]  정산 2009/05/09 2237
45  [문학,교양] 시간의 빛  정산 2009/03/09 2063
 [문학,교양] 음예공간예찬 [4]  정산 2009/02/17 2151
43  [문학,교양] 내게 말을 거는 공간들  정산 2008/12/23 2163
42  [예술,사진] 일하는 예술가들 [2]  정산 2008/12/09 2212
41  [문학,교양]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4]  정산 2008/09/18 2261
40  [문학,교양] 밥벌이의 지겨움  정산 2008/07/29 2053
39  [경영,미래] 2010 대한민국 트렌드  정산 2008/06/14 2062
38  [문학,교양] 오래된 정원 [6]  정산 2008/04/08 2209
37  [문학,교양] 남자 나이 50  정산 2008/03/21 2137
36  [문학,교양] 자전거여행 1. 2  정산 2008/02/11 2082
35  [문학,교양] 일분 후의 삶  정산 2007/12/31 2045
34  [문학,교양] 마당 깊은 집  정산 2007/11/18 2534
 
  1 [2][3]
Copyright 1999-2018 Zeroboard
인터넷 정산헌

sitemap    home    guestbook


Copyright (c) 2004  Jeongsan.  All rights reserved.

Contact 3syk@naver.com for more information.